환자 역할의 고단함 2
불운을 대하는 자세
전화로 진단명을 말씀드리자마자 어머니는 너무 놀라서 비명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오후가 한참 지나서야 평정을 찾고 나서 하신 말씀은 이랬다.
“네가 그 일 하면서 마음을 많이 써서 그랬을까….”
‘그 일’은 내가 그나마 오래 했던 직업이다. 시민사회단체와 그 언저리에서 했던 일들, 특히 성폭력 피해자를 만나고 지지하는 활동은 어머니에게 자부심과 염려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곁에서 보기에 일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단단해지기보다는 허물어지고 덧날 일이 많다고 여겨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만두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려면 여전히 목이 콱 메어서 말을 잘 못 하는 모습을 보셔서 그랬을까.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현장에서 십수 년, 수십 년을 열정적으로 일한 활동가와 연구자 들이 나보다 먼저 아파야 하는 게 맞다. 활동가들이 열악한 조건에서 몸과 마음을 바닥까지 긁어 쓰느라 자주 아프곤 하지만, 내가 그런 경우라는 해석은 스스로 하지 않아 왔다. 길게 설명할 마음의 여유는 없어서 그런 거 아니라고만 하고 말았다.
어떤 마음인지 모르지 않는다. 멀쩡히 잘 지내고 있었던 딸에게 갑자기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치료를 하지 않으면 곧 죽는다고 한다. 입원 절차와 치료 스케줄이 순식간에 주르륵 펼쳐지고 가슴 위쪽에 항암제 투여를 위한 관이 뚫렸다. 벼락같은 일이고 사고 같은 일, 앞뒤 맥락이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에는 그것을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논리적이지 않고 아무 상관이 없어도 인과관계를 만들어 자기 탓을 하게 된다. 어떤 성소수자 부모들은 ‘내가 딸아이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것이 잘못일까’라고 자책한다. 어떤 성폭력 피해자들은 ‘내가 애초에 그곳에 있지를 말았더라면’이라고 자책한다. 어떤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내가 좀 더 융통성 있게 남편 기를 살려주었으면 이 사달이 안 났을 텐데’라고 자책한다.
구체적인 상황을 가정해서 ‘내가 이랬으면 나았을까, 저랬으면 나았을까’ 생각해도 막막함이 해소되지 않아서 ‘벌 받는 건가 봐’ 하고 낙담하는 사람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서 위험한 일터로 내몰고, 비난하며 손가락질받게 하고, 사회에서 자리를 빼앗아 버려서 결국에는 죽여버리고 마는, 정말 큰 죄를 지은 사람들조차도 그 죄의 대가로 질병이라는 벌을 받아 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 왜 이런 일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스트레스가 몸에 좋을 리 없겠지만 암을 억제한다고 하는 여러 허들을 몽땅 무너뜨렸다고 해석할 만큼 내가 오래, 헌신적으로 일하지도 않았다. 썩 유능한 사람도 아니었다. 내 일을 좋아하기는 했다. 시간을 두고 다시 돌아가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더 잘해내고 싶을 만큼 좋아했다. 마음을 기울였던 일들을 후회하게 만드는 재해석이라면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또 조금은 생각했다. 내가 뭘 잘나서 불운이 나만 비껴가나.
불운도 행운도, 운이고 우연이다. 물론 집안이 부유하고, 좋은 학교를 나오고, 직업이 좋으면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운빨’이 좋아질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에 뚜렷한 인과가 있을 수는 없다. 애초에 인과율과 합리성, 각 잡힌 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설명하려고 운이라는 단어가 있다. 씨앗에 물을 주면 새싹이 자라는 인과의 세계가 자연스러운 만큼, 밑도 끝도 없고 뒤죽박죽이라서 설명할 수 없는 세계 또한 자연스럽다. 내 잘못도 남의 잘못도 없이 이 질병이 내 앞에 그저 도착했다면, 그 질병 또한 이유 없이도 자연스러운 내 몫 아닐까.
엄습하는 공포로 잠이 오지 않았던 진단일 밤, 나는 왜 하필 나냐는 의문 대신 자연스러운 과정으로서의 죽음을 떠올렸다. 동생과 나는 서로의 등을 눈물로 적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치료에 들어서면서부터 나의 최후를 상상하고 눈물짓는 식의 감상은 없던 일이 되었다. 새로운 일상이 도래했고, 죽음이 묵음 처리되는 하루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바빠졌다.
*
앞일을 알 수 없지만,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치료를 받았고, 컨디션이 허락하는 대로 무균실 안에서 할 수 있는 소일거리들을 찾아서 했다. 내가 이 대형병원에 도착한 이유를 탓할 곳이 없어서, 원인을 찾을 길이 없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원인을 알 수 없다”라는 의사의 단순한 말은, 문제(로 추정되는 것)를 도려내고 없애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지 않아서 듣기에 좋았다. ‘내 몸은 내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나의 몸은 내 자아의 것이 아니다. 치료의 향방은 내 골수만이 안다. ‘나를 지켜보고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열심히 이겨내자’는 다짐으로 불확실하기만 한 미래를 어떻게 지나가게 될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의지가 깊은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가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말을 하는 그도, 듣고 있는 나도 알고 있었다. 어떤 경험은 차원을 넘는 것과 같아서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기억을 지우는 방법이나 시간을 되돌리는 기술은 없다. 그저 바람일 뿐이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어느 경우에나 영영 나쁜 것도 아니다. 나를 해친 그 경험이 현재와 미래의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많은 피해 생존자가 자신을 고립시키고 억누르는 세간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평온해 보였던 일상이 실은 폭력으로 쌓아 올린 성채였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이전과는 다른 시선과 에너지로 사건 이후를 살아나간다.
나는 이 과정이 뒤죽박죽으로 집을 꽉 채운 커다란 짐 더미를 서랍에 정리해 넣어두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처럼 정리가 되지 않는 짐 더미 앞에서 여러 날 막막하게 울 수도 있지만, 차차 부피를 줄이고 잘 개키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세간살이의 구조를 바꾸어도 좋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도 좋다. 그러다 보면 내 앞을 가로막거나 발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는 정돈이 된다.
마음에 좀 여유가 생기고 나면 제법 멋지게 바뀐 방의 모습에 으쓱해지기도 할 것이다. 아마 서랍을 열어보면 감당 안 되던 그 짐이 솜씨 좋게 접은 별 모양이나 학 모양이 되어 있을지도.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실의에 잠긴 사람에게, 나름대로의 서랍론을 이야기하곤 했다. 없어질 일은 아니지만, 잘 정리해 둘 날이 올 것이며 당신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서랍이 꼭 잘 닫혀야 할까 싶기도 하다. 내용물이 서랍에 비해 너무너무 커서 아무리 정리를 해봐도 주책없이 늘 열려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어쩌면 서랍론은 가끔 의미 있게 꺼내볼 정도가 된 내 폭력 피해 경험에 국한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치료를 마치고 병이 낫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계속 잘 닫히지도 않는 서랍을 이고 지고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절망 너머의 삶은, 깔끔하게 정돈된 일상과 난처하고 곤궁한 처지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편이 맞았던 것 같다. 헤벌레 열려 있는 서랍도 내 모양이려니, 덜그럭거리는 소음을 견디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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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원인이 혹시 마음고생이 아닐까 염려했던 어머니와 달리, 나는 내가 ‘그 일’을 해서 무척 다행이다. 내가 지켜보며 경험한 회복은 단 한 번도 ‘예전처럼 온전하고 멀쩡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단어였던 적이 없었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아갈 방법도, 상처를 받기 이전의 무결점(이라고 회상되는) 상태로 돌아갈 방법도 없었다. 상처가 흉터 없이 매끈하게 아무는 걸 회복이라고 일컫는 것도 아니었다. ‘그 일’을 한 덕분에 극복 서사로 환원되지도 않고, 극복 서사가 될 수도 없는 회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상위 몇 퍼센트가 누릴까 말까 한 성취와 정복의 위풍당당함이 아니라 늘 흔들리지만 소중한 것을 유지하려는 작고 평범한 애씀. 그 또한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늦게 깨달았을 것이다. 환자가 지녀야 하는 ‘긍정적인 마음가짐’ 목록에 완치 말고도 변형과 수용, 때로는 죽음조차 머뭇거리며 얹어보는 불완전한 용기. 그런 걸 떠올리면 수런거리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고요가 온다. 나는 이번의 서랍 정리에 실패할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모두, ‘그 일’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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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병자가 되면서 인간관계가 조금씩 정리되었다. 치료 방법에 대한 견해차를 두고 갈등하다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코로나19 백신이 백혈병의 원인이라든가, 몸을 따뜻하게 해야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첨언으로 언쟁에 불이 붙기 일쑤였다.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 끝에 상대와 나는 상반된 의견을 흐린 눈으로 덮어두거나 서로를 한심하게 여기며 멀어졌다. 무엇이 내 심기를 건드렸다는 말을 길게 하기 어려워 내 쪽에서 연락을 끊은 적도 많지만, 상대 쪽에서 나를 괘씸하게 여겨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안타까워서 말을 해주는데 따박따박 말대꾸라니? 나는 예전에 어떤 행사의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당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활동가였다. 당시에도 타투를 한 사람을 볼 일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또 지금만큼 흔한 광경은 아니기도 했다. 내 옆에 앉아 있었던 다른 기관의 소장이 내 쇄골 아래의 타투에 관심을 가졌다. “이거 스티커예요, 아님 진짜로 문신을 한 거예요?”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서 그 부위를 문질렀다. 그때까지 내 주변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맞은편에 있던 동료가 “그렇게 막 만지면 안 되죠” 하고 한마디를 했다.
그 말이 소장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그는 자기 가슴 위를 거칠게 문지르는 시늉을 하면서 “아니, 내가 가슴을 막, 만졌어?”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성추행만 문제가 아니고 성추행이 아니더라도 부적절한 침해가 있지만, 그는 자신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었다는 무안함을 견디지 못했다.
이러한 장면은 낯설지 않다. 자신이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평등을 지향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자기 행동이 제재받으면 이를 성찰하기보다는 자신의 높은 인격성이 공격받았다고 느끼며 날 선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내게 “젊은 나이에 딱하다”라든가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라”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하니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좋겠다”라고 하면 그 익숙한 태도가 튀어나왔다.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여성들이 성차별적인 언행에 항변할 때마다 숱하게 되돌려 받았던 바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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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책 중인 개도, 유아차에 탄 어린이도 ‘귀엽다’는 이유로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나이 차별과 용모 차별에 대항하는 시민 캠페인의 결과, 이제 다짜고짜 나이를 물어보며 서열을 매긴다든가, 살 빠졌다느니 예쁘다느니 하는 말을 칭찬이랍시고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안다. 병자에게도 그렇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대해주기를 바라냐고? 나도 이야기해 줄 수 없다. 〈병자를 위한 올바른 대화 매뉴얼〉 같은 것을 만들 수는 없고, 만들어 봐야 아무도 지키지 않을 것이다. 여태 실컷 떠들다가 이제 ‘듣겠다’며 입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도 어딘가 익숙하다. 여러분이 바라 마지않는 병자의 안녕을 위해서 병자를 대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 주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이 글을 읽는 거의 모두가 유병장수할 시대다. 나의 질병이 내 탓이 아니듯이, 몸이 아프고 불편해지는 미래는 저주가 아니라 지금을 사는 인간에게 당면한 현실이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무안하게 만들었다며 불평하는 건 당신만 손해 보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내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믿는다. 어설픈 디자인의 총천연색 사탕 껍질 같은 것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포장지 속에 귀중하게 싸 들고 온 당신의 우정을 믿는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당신과 나의 대화를 가능하게 할 거라고도 믿는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