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쓸모
기록의 의미를 믿으며, 의심하며
이웃과 둘레길을 걸으면서 몸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이식 전처치 항암의 결과 조기폐경을 맞았고, 이웃은 서서히 다가오는 완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와 목덜미가 갑자기 뜨거워지고 땀이 뻘뻘 나서 잠을 설치기가 다반사. 배 속부터 덥고 불쾌한 이 느낌을 어찌해야 하겠냐며 동병상련을 나누었다. 이웃이 목소리를 낮추더니 자기는 요실금도 경험해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웃겨서 막 깔깔거리고 웃었는데 오줌이 쓱 나와버렸다고, 당황스럽고 난처했다고.
치매에 걸려서 혼자서는 잘 살아갈 수 없게 된 노년의 풍경은 흔히 ‘벽에 똥칠하는 노인’으로 상상된다. 또 아이의 배변 훈련은 제 몫을 하면서 사는 인간으로 자라나기 위한 생애 초기의 중요한 과제로 여겨진다. 그만큼 똥오줌을 못 가리는 건 사회적 인간으로서는 치명적인 결격사유다. 간혹 어떤 병실 동료는 혼자 일어나서 침상 곁에 둔 간이 변기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고도 화장실에 기어서라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대소변을 가리는 일이 그렇게도 중요할진대, 요실금이 암만 자연스러운 손상이라고 해도 축축해진 아랫도리가 달가울 수는 없다.
저만큼 떠밀려 갔던 기억이 되살아서 왔다. 다행이라면 나는 대소변과 체액을 배출하는 데 별도의 의료기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이식병동에서 대소변을 지린 적은 있다. 항문이 다 헐어 힘을 줄 수가 없는 탓에 수시로 방귀가 픽픽 나오던 시기였다. 방귀와 대변은 잘 구분되지 않았고,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종종걸음으로 가는 그 몇 발짝의 길에 설사를 흘려버리곤 했다. 헐렁한 병원복 바지 속에서 허벅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축축한 느낌이, 그러다가 움직이는 결에 바지가 설사에 들러붙어 느껴지는 젖은 천의 감촉이 난처하기도 불쾌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지금 아프니까.
더러워진 병원복과 엉덩이를 씻어내고, 벨을 눌러 간호사에게 진통제를 달라고 요청하고, 좌욕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고 베타딘 용액을 풀었다. 엉덩이를 담그고 앉아 있으면 간호사가 와서 문밖으로 길게 늘어뜨린 링거줄에 진통제를 놓아주었다. 젖은 병원복 바지를 간호조무사가 가져갈 수 있도록 둘둘 뭉쳐서 정해진 장소에 놓아두고, 침상으로 돌아가 통증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엎드려 있다가, 다시 배가 아프면 변기에 앉고, 엉덩이와 바지를 씻어내고 좌욕하는 일의 반복. 매일 새벽 하는 소변검사 중에 가끔은 손이 떨려서 소변을 검체통 바깥에 흘리거나 아예 쏟기도 했다. 퇴원해서 외래진료를 받던 동안 움직임이 어설퍼서 소변검사용 종이컵을 엎질러 걸어놓은 패딩 점퍼에 흩뿌린 적도 있었다. 그 옷을 입고 집에 가야 하는데, 혹시 감염이 될까 봐 겁이 앞섰다. 비좁은 화장실에서 소독 티슈를 꺼내 패딩을 닦으면서 그때는 조금 슬펐던가, 화가 났던가.
여전히 부끄럽지는 않았다. 나는 아픈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 아픈 누구나 지나야 할 과정일 뿐인데, 이런 걸 꼭 신파조의 이야깃거리로 만들어야 할까.
*
뒤뚱거리며 이식병동의 복도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대충 닫다 만 비닐 커튼 사이로 누군가가 노인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닦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한 손으로도 허리와 엉덩이 사이를 받쳐 들 수 있을 만큼 말랐다. 검붉게 얼룩진 피부와 앙상한 성기가 무심하게 드러났다. 다른 쪽 손에 티슈를 쥐고 노인의 엉덩이를 닦는 폼이 섬세해 보이지는 않았다. 돌보는 사람의 억센 팔 힘과 노인의 무기력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였기 때문일까. 내가 지린 대소변을 씻어내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는데, 그날은 수치감이 들었다. 못 본 척 걸었다.
돈을 주고 고용한 간병인은 가족과 달리 환자를 살뜰하게 보살피지 않는다는 편견이 있지만,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가족주의적인 편견이 작동할 여지를 주지 않는 중노동이다. 더군다나 코로나19 유행 당시 무균실과 이식실에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은 병원 밖을 나갈 수도, 다른 사람과 자주 교대할 수도 없었다. 병동에서는 중환자실을 들락거리는 환자의 곁에서 눈이 텅 비어버린 보호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생판 처음 본 고객님이든 사랑하는 가족이든 간에 먹이고 입히며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은 때 되면 처리해야 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노인과 돌보는 사람 사이가 고용 관계인지 알고 지내던 관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무심결에 노인의 치부를 보았고, 얼굴도 보았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우신예찬』으로 유명한 르네상스 시대 신학자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는 『어린이의 예절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소변이나 대변을 보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은 예절에 어긋난다. 예의 바른 사람은 자연적으로 수치심과 결부된 신체 부분을 불필요하게 노출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상에서 용변을 보는 일이 가능했던 1530년대의 이야기다. 20세기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는 저서 『문명화과정』에서 이후의 문헌들을 검토해 나가면서, 점차 대소변에 대한 이야기조차 불경하게 여겨지며 사생활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1]
이제는 타인이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용변을 보는 사람을 상상하기 어렵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용변이 급하면 “볼일이 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 하는 식으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다. 오늘날 노상에 엉덩이를 까고 앉은 성인은 만취한 주정뱅이뿐이다. 그런데 에라스뮈스가 글을 쓰던 시대에도 용변 보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고 말을 거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볼일을 해결하고 있는 사람은 있어도 없는 듯, 얼굴 없는 존재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내가 대소변을 옷에 묻히고도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내 몸이 아예 통제 불능의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럭저럭 거동할 수 있어서 더럽힌 옷을 남에게 보이지 않고 수습할 수 있었다. 병동의 화장실은 바깥에서 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문에 모루유리가 있는데, 내게는 샤워를 하기 전에 벗은 옷을 걸어두어 유리를 가릴 여유도 있었다. 부작용이 사라지는 시기가 오면 괜찮아질 거라는 전망이 쓰리고 부끄러운 감각을 상쇄시켰다. 병자라는 신분 덕에 잠시 제 앞가림 못 하는 것쯤 어쩔 수 없다는 정당성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신체적인 고통은 쉽게 휘발되고, 경험담으로 소환될 때나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고 더듬거리며 떠올릴 뿐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을 스스로 추스를 아무 힘이 없고, 돌보는 사람도 지쳐버린 어느 결에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그 노인에게도 기저귀를 가는 모습은 노출하고 싶지 않은 사생활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수치를 스스로 숨기지 못하는 타인의 무방비와 불능을 목격하는 순간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 전까지는 내가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치료 절차에 따르는 환자라서, 즉 환자 역할을 잘 수행하는 환자라서 쓸데없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잘 갖추어진 의료 시스템과 이웃들의 조력을 받더라도, 타인의 불능을 목격하면서 수치스러워하고 타인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저것이 나의 미래가 되지 않을지 점치는 일은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 또한 환자 역할에 해당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힘든 시간을 지나고 나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걸까. 여전히 고통으로 사람이 성숙해진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망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고통은 삶을 바라보는 렌즈의 곡률을 바꾼다. 병동 동료들이 웃고 찡그리던 얼굴을 되새김질하면서, 고통받은 사람들이 쓴 기록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한숨 돌리는 지금, 가을바람처럼 불어오는 회한.
*
아픈 사람들의 기록을 읽으며, 막연하게 혹은 낭만적으로 알았던 것들을 훨씬 가까운 나의 현실로 다시 깨달았다. 사람은 살로 이루어져 있고 말랑말랑해서 생각보다 잘 찢기고 녹고 썩을 수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입에 구더기가 생기기도 한다는 걸 오래 몸져누운 노인의 사례로 읽으며 알게 되었다. 눈, 코, 입, 귀, 항문, 요도, 질이 아닌 인공적인 방식으로 몸의 내·외부를 연결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매끈한 피부 위에 툭 튀어나온 인공물은 겉으로 보기에 혐오스러울 수 있고, 냄새가 나서 주변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 수도 있다. 화상과 같은 외상을 입었거나 아토피가 심한 사람, 혹은 조혈모세포 이식의 후유증이 피부로 온 사람은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뻣뻣해진다. 화상을 심하게 입으면 피부가 뻣뻣해지고 모공이 녹아 없어진다.
아버지는 일을 하다가 화상을 입었다. 일하던 공장 바닥에 인화성 물질이 있었는데 거기에 불씨가 튀었다. 발치에서 순식간에 불길이 솟아올라 아버지의 눈썹과 이맛전의 머리털을 태워버렸다. 근처에 있었던 직원이 재빠르게 물을 가져다 부었지만, 양다리 앞쪽은 피부 이식을 해야 했다. 불길에 상하지 않은 몸 뒤편 피부를 떼어서 붙였다. 새로 난 살은 양쪽을 잡아당긴 비닐처럼 팽팽하거나, 우글거렸다. 젊은 날 심한 교통사고로 보조기구를 박아놓아서 생긴 어지러운 흔적과 함께, 아버지가 내놓은 맨다리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붙었다가 가곤 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화상은 그뿐이다. 얼굴의 형체를 녹이거나 떡처럼 굳어지고 부푸는, 혹은 가죽이 오그라져 뼈까지 구부러뜨리는 화상은 알지 못한다.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워 모으는 동안 『나를 보라, 있는 그대로』라는 중증화상 경험자 생애사 기록집을 읽으면서 나와 다른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을 뿌리면서 환부의 고름들을 거칠게 문질러 씻어내면 수챗구멍으로 핏물이 씻겨 내려간다는 화상 치료 방식은 읽기만 하는데도 이가 악물렸다. 그렇게 사지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이지만, 이들과 얼굴을 마주하기는 어렵다. 얼굴을 본 사람은 놀라 비켜서고, 얼굴을 보인 사람은 죄 없이 숨는다. 화상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작가이자 활동가인 홍은전은 이렇게 썼다. “이야기가 된 고통은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는 힘이 있어요. 그 이야기를 하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요. 그리고 그 힘든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하죠.”[2]
고통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조금은 회의한다고 앞에 썼다. 저마다의 이유로 모두 아프다는 사실은 조금 위안이 된다. 사회적인 이유로 발생하는 고통은 사회적으로 개선되어야 하지만, 모든 고통이 공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고통은 아주 사적이고 끝내는 고립된 감각이며, 아무리 사람들과 나눈들 깔끔하게 나누어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말이나 경험으로 통역할 수도 없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끼리 서로를 덧내기도 한다. 너만 아프냐는 핀잔과 너 혼자만은 아니라는 위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아파서 죽을 뻔했다는 방백이 도움이 될까 싶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함께 걷기’라는 행사가 있다. 화상 경험자들과 비경험자들이 함께 행진하면서 화상에 대해 알리고 생존자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자리다. 책을 읽고 나서 찾아본 보도 사진에는 대열의 맨 앞줄에 서서 웃고 있는 최려나 씨가 보였다. 화상 경험자 정인숙 씨는 “스물다섯 살 아가씬데 모자도 안 쓰고 스카프도 안 하는 거예요. (…)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라고 그를 회상한다.[3] 정인숙 씨도 아마 그 자리에서 처음 얼굴을 드러냈을 것이다.
화상 경험자들이 함께 걷는 현장의 분위기를 상상하다가, 혈액내과 진료실 앞에서 자주 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두덩이가 벌게져서 각질이 달라붙은 안경을 쓰고 있는 내 앞에 이식 후유증으로 백반증을 얻은 환자가 서 있다. 손바닥이 북어 껍질처럼 벗겨져 빨갛고 얇은 비닐처럼 된 또 다른 환자는 손가락 옆에 거스러미처럼 말라붙은 피부를 손톱으로 벗겨낸다.
2000년대 초반 글리벡 약가 인하 투쟁에 뛰어들었던 고 김상덕 씨도 조혈모세포 이식 후유증으로 백반증을 얻었다. 글리벡은 이전까지 조혈모세포 이식이 치료의 전부였던 만성골수성백혈병의 확실한 치료제로 등장했으나, 당시 기준 한 달 약값만 최소 300만 원이 들었다. 글리벡의 제약사 노바티스 앞에서 열린 첫 항의 시위에 환자복을 입은 백혈병 환자, 보건의료인,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들이 모였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마친 김상덕 씨에게는 글리벡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환자라는 정체성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경찰 병력과 대치하던 중, 그는 상의를 벗어 백반증으로 얼룩덜룩한 몸을 드러냈다.
“자, 봐라. 이놈들아. 난 백혈병 환자다!”[4]
당시 그와 환자운동을 함께했던 간호간병시민행동 강주성 대표는 김상덕 씨가 HIV 감염인에게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고 회고한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조혈모세포 이식을 치료의 마지막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격려사를 남기며 환자의 곁을 떠나기도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치료 후유증을 다스리는 생소한 약물과 초고가 항암제 사이에서, 흘깃대는 눈들 사이에서 종종거린다. 눈두덩이에 질병의 흔적인지 훈장인지를 붙이고서, 앞에 앉은 이의 솜털 나고 얼룩진 뒤통수를 바라보며 고통의 쓸모를 재차 의심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이야기가 된다면 어떨까. 덜 외로워진 마음으로, 다시 책장을 넘긴다.
참고 자료
1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문명화과정 1』, 박미애 옮김, 한길사, 1996.
2 송효정·박희정·유해정·홍세미·홍은전, 『나를 보라, 있는 그대로: 화상경험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온다프레스, 2018.
3 앞의 책.
4 강주성,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 의료의 중심은 환자! 환자의 눈으로 보고 말하는』, 프레시안북, 2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