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선의
조혈모세포 공여자께 드리는 생존신고
나에게 조혈모세포 기증을 해준 공여자에게 무어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까. 정확하긴커녕 진실에 가까운 말도 찾지 못해서 계속 말을 고르고 있다. 덕분에 새 생명을 받았다거나 새로운 생일이 생겼다는 말은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은 종교가 없는 내게 다소 종교적이고, 막연하며, 사실이 아니었다. 기적이라는 말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기적이라는 사건 이후에도 삶은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다. 사실이 아닌 표현을 의례적으로 한다면 오히려 제대로 된 감사가 아니지 않을까. 맞는 말을 고르는 것도, 맞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공여자의 선의에 대한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날 말을 골랐지만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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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혈모세포 이식 공여자를 찾는 순서는 형제, 기증 희망자 등록을 한 내국인, 부모, 해외 공여자 순이다. 동생과 나의 HLA(조직적합성 항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듣고 이식 코디네이터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코디네이터는 기증 희망자 중 대강의 HLA가 같은 경우에도 항원이 완전히 일치하는 확률은 60~70퍼센트 정도이며, 완전일치자 가운데 기증에 동의할 확률도 60~70퍼센트 정도라고 했다.
“예전에는 전화를 받으시면 흔쾌히 한다고 하시는 편이었지만 요즘은 안 그래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찾더라도 공여자의 스케줄에 맞춘다고 생각하셔야 해요. 가족끼리 이식을 진행해도 공여자 스케줄에 거의 맞춰줘요.”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섣불리 기대를 키우지 말고 매 단계마다 침착해야 한다는 속뜻이 읽혔다.
2만분의 1의 확률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기회가 있다는 것은 무척 낭만적인 일로 보이기도 한다. 신체 어느 부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생기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면식 없는 사람을 위해 멀쩡한 피부에 구멍을 뚫어 카테터를 넣고, 뼈가 몹시 아플 수 있는 주사를 매일 맞으며 병원에서 며칠을 보내는 과정을 감내하기로 하는 것은 큰 결단이다.
한편 이 유·무형의 가치를 엮어내서 ‘조혈모세포 이식’이라는 의료적 현실로 만드는 실무는 환자-병원-조혈모세포은행-공여자 사이에 배치된 각 의료행위자가 담당한다. 설명과 서명을 위해 펼쳐진 태블릿 위에서 이식에 수반되는 부작용과 위험은 금방 이 장에서 다른 장으로 넘어갔다. 나도 특별히 궁금하지 않았다. 왜 설명하지 않는지 묻지도, 다른 질문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이식 부작용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은 이미 숱한 검색과 환우회 카페 글들을 통해서 배웠다.
나 말고도 그 자리에서 서명을 해야 할 다른 수많은 환자 또한 담당자가 긴 설명을 해주길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료행위자도 바쁘지만, 환자도 늘 시간 빈곤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또 원칙대로라면 환자에게 부작용 고지를 해야 하지만, 치료 의욕을 꺾을 수 있다는 이유로 은근히 불필요한 절차로 치부되기도 한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앞두고 이식 절차 안내와 부작용 고지를 받는 날 소집된 건 환자가 아니라 보호자들이었다. 보호자들도 치료 성공이라는 목적 아래에서 의료인들의 이러한 의도를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환자와 보호자가 원하는 건 ‘나(혹은 가족)에게 발생한 바로 이 증상’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보건학자 김창엽이 “전문직뿐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도 으레 ‘탈돌봄화’ 된, 기술 위주의 의료를 기대하고 원하게 되었다”라고[1] 지적한 것처럼 발병의 원인이 된 유전자 변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있는지 등등이야말로 의료인에게 전달받고 싶은 과학적이고도 구체적인 지식이다. 고도화된 의료기술 환경에서 환자가 이를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다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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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백혈병 환자가 이식을 앞두고 있거나 이식 경험이 있기에 병동에 있는 백혈병 환자와 보호자에게 조혈모세포 이식은 빠지지 않는 이야기 주제가 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름을 묻듯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조혈모세포 이식을 할 예정인지, 공여자를 찾았는지, 한다면 언제 할 예정인지를 묻고 답한다. 이식 후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에 감염이 진행되기까지 하면 환자와 보호자들의 시름은 깊어진다. 내 옆 침상으로 입원한 재발 환자는 매일 밤 온몸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젊은 사람한테 못 받아서 이렇게 되었나….”
그의 탄식은 젊은 환자인 나에게 모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지만, 보호자가 상주하는 일반병동에 머무르며 비슷한 이야기를 숱하게 듣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병에 걸린 것이 고생을 해서인지, 내가 뭘 잘못 산 탓인지 하며 이유를 찾듯이 재앙에는 이유가 붙어야 하니까. 폐에 곰팡이가 침입해서, 입에 생긴 염증을 타고 눈으로 올라간 세균 때문에 한쪽의 시력을 잃어서 걸핏하면 헐떡대며 처치실로 들어가기 일쑤인 환자에게 지친 보호자들은 휴게실에 모여 서로의 처지를 나누며 그 이유를 추측하곤 했다.
“이식을 하면 끝나는 줄 알았지.”
“나이 든 사람 피를 받아서 재발이 되었나.”
“젊은 사람 거가 너무 세서 나이 든 환자가 감당을 못 했나.”
“여자 피를 받았더니 남자 환자한테는 힘이 달렸나….”
경과가 좋지 않은 환자나 그들의 보호자가 공여자를 원망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조혈모세포 기증은 백혈병뿐만 아니라 중증의 골수형성이상증후군, 재생불량성빈혈 같은 혈액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과 일부 고형암 환자들에게 거의 유일한 완치 기회다. 절망에서 붙잡는 천운 같은 동아줄인 것이다. 이식을 마치고 순탄한 회복 과정을 밟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상황이 나빠진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그렇다.
그러나 기적은 한 건의 이벤트일 뿐 이어지는 삶과 사건들 속에서 순수하게 감사한 마음만 100퍼센트일 수는 없다. 절망과 푸념은 치료가 실패했음을 확인하면서 저절로 따라 나오는 마음일 수밖에 없고, 환자와 보호자의 양가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추론들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나이 차별과 성차별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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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환자가 카테터를 제거하는 시기가 되었지만, 아직 나는 그대로 두고 있다. 적혈구를 수혈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혈액형이 공여자의 혈액형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통상의 기간을 훌쩍 넘어섰다. 기다려서 해결될 문제라면 다행이지만, 생착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골수검사 결과가 괜찮다면 한시름 덜고 조혈 기능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경우에는 재이식도 고려해야 한다. 휴게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보호자들의 말이 생각났다. 공여자의 나이 때문에, 성별 때문에 이식이 잘되지 않았다면 나는 페미니스트라서 청년 남성 공여자의 세포가 도망가 버린 걸까.
물론 그럴 리 없다. 나와 공여자 각자의 조혈모세포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화를 거친 인격체가 아니니까. 무엇보다 나는 공여자가 준 기회를 시작으로, 일어날 수 있는 나쁜 부작용들을 피해 지금까지 100여 일이 넘는 생존을 얻었다. 그러나 다소 임시적으로 살아 있는 듯한 지금의 상태를 ‘새 생명’이라는 표현으로 퉁쳐서 말할 수는 없다. ‘새 생명’은 어디까지나 사후적인 해석이다. 내가 공여자로부터 얻은 것은 ‘무조건적인 선의’라는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그 결단에 뒤따라온 생존 기회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의 상황이 바뀌어 갈 때마다 이 해석도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나도 어느 날 문득 다른 이식 수혜자들처럼 궁금해졌다. 나의 공여자는 왜 기증 희망자 등록을 했을까. 코디네이터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당신의 조혈모세포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라 고 했을 때 왜 기증할 수 없다고 번복하지 않았을까.
공여자는 선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선량한 행동이 옳다는 걸 안다고 곧장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기증 희망자 등록을 하고 나서 연락이 되지 않거나 기증을 거부한다고 알려진 약 30~40퍼센트의 비율은 선량한 마음과 행동의 간극, 그 사이에 있는 여러 현실적 갈등과 번민을 증명한다. ‘선량하다’, ‘착하다’라는 표현을 두고 굳이 선의라는 단어가 있는 이유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량함을 행동으로 관철하는 의지를 빛내기 위해서일 터. 우주적인 관점에서 삶은 대체로 생성했다가 소멸하기를 반복하는 자연계의 사이클일 뿐 별 의미가 없겠지만, 나와 당신과 우리라는 미시적인 영역에서는 삶의 의미가 생존을 이어가게 해주기도 한다. 공여자가 나에게 보내준 것은, 어쩌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풍부하게 가꾸고자 하는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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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디네이터로부터 완전일치 공여자를 찾는 과정을 전해 듣고 주변 사람들에게 옮길 때, 주소에 빗대어 설명하곤 했다.
“예를 들면, 내 조혈모세포에 주소가 있어. 전체 주소는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 1길의 23이야. 23까지 주소가 다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제일 좋아. 그런데 조혈모세포은행에 사람들이 기증 의사를 밝혔을 때, 검사를 신사동 1길의 23까지 다 해놓으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어. 그래서 신사동까지만 일단 확인을 해놔. 찾아봤더니 126명의 기증 희망 등록자가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까지 나랑 같다고 확인이 되었어. 차례로 검사를 해보니 그중에서 5명의 등록자가 1길의 23까지 다 맞대. 2명에게 연락을 해보았는데, 두 분 모두 기증하겠다고 해주셨대.”
쇄골 밑의 카테터를 타고 흘러들어 온 조혈모세포는, 집주인에게 주소를 안내받은 손님처럼 알아서 골수라는 집을 찾아 들어간다. 나도 우여곡절 끝에 이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와 같이 밥을 먹고, 축하를 받고, 새로 이사 온 동네의 둘레길을 돌며 산책을 했다. 작년에 보았던 겨울 철새가 다시 들녘에 돌아온 풍경을 보았다. 해가 지면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차를 끓이고 한 움큼의 약과 밥을 먹으며 또 다른 하루를 시작했다.
때로는 ‘반드시 생존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라든가 ‘아픈 사람이 다 생존을 해야 하나’ 하고 자문했다. 하지만 의문은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치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슬프고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금방 희석되어 버리곤 했다. 생존에 거창한 이유는 없지만, 100여 일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 부대끼며 살았던 구체적인 일상이 그들을 안심시켰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출산을 앞둔 지인은 제대혈을 기증하겠다는 결심을 들려주었다.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자 등록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여자를 찾기까지의 과정을 전해 듣고 함께 떨면서,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들 곁으로 돌려보내 준 익명의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타인의 선의가 또 다른 사람들의 선의로 번져가는 풍경들, 그래서 수많은 우연과 인과의 총합이 또 누군가를 요행처럼 찾아가 기적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 순간들. 근본적으로 삶도 세계도 무의미하다는 공허한 불안감은 이렇게 어떤 의미에 기댄 다른 의미들의 연쇄로 채워진다. 조금 더 공들여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나마 나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