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쪼대로 아플 자유
병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상상
혼자였다. 위치는 속초에서 미시령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있는 어느 신축 모텔. 귀 체온계의 액정은 39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윗입술에 닿는 숨이 너무 뜨거운데 몸은 깨질 것처럼 추웠다. 그렇게 된 지 한나절을 넘겼다. 몇 알 남지 않은 타이레놀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한 알을 털어 넣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전화가 왔다. 친구였다. 긴 오한으로 온몸의 근육이 욱신거리던 그 밤, 나는 이미 병풍 뒤의 송장이 된 것처럼 이불 밑에 누운 채 친구와 오래오래 통화를 했다.
한 회차가 한 달가량 진행되는 항암을 3회차까지 막 끝낸 참에 떠난 여행이었다. 직전에 외래진료를 받았다. 이만하면 호중구가 올랐겠다 싶은 시기였고, 혈액검사상으로도 바닥을 찍고 오르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수치를 확인했다. 경험상 이제 팝콘처럼 뻥뻥 오를 것이었다. 그래서 불과 그날 아침까지도 하던 대로 조심만 하면 감염될 일은 없겠다고 판단했다. 오판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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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병하기 1년 전 운전면허 취득과 동시에 중고차를 덜컥 장만했다. 유지비를 어떻게 감당하나 겁도 나고 후회도 되었는데, 아프고 나니까 다행이었다. 면역 저하 상태라는 이유로 대중교통 이용이 권장되지 않았다. 북적이는 대형병원을 오가며 대중교통의 북적임을 감내할 만큼의 정신력도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병원에 가든, 바람 쐬러 나가든 어딜 나다니려면 보따리가 한가득이었다.
양양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목표는 주전골에 가서 단풍 보기. 갈아입을 옷가지와 약 더미, 손 소독제와 숙소 기물을 닦을 소독 티슈, 카테터 부위를 드레싱할 때 사용하는 소독 면봉과 필름 등의 짐을 모두 꾸려서 뒷좌석에 실어놓았을 정도로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었다. 진료를 마치자마자 속초에 숙소를 예약하고, 늘 들고 다니는 귀 체온계와 타이레놀을 조수석에 던져놓았다.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1시간 반쯤 지났을까. 홍천 즈음 와서 머리가 조금 멍하고 코 밑이 더운 게 이상했다. 이마에 댄 손바닥이 내가 느끼기에도 지나치게 뜨듯했다. 휴게소에 멈춰 귀 체온계를 여러 번 확인했다. 틀림없는 39와 소수점 뒤의 숫자들.
아. 망했다.
기침은커녕 목이 가렵지도 숨이 차지도 않았으니 호흡기 감염은 아닌 것 같았다. 폐렴이라면 골치가 아프니 앗 뜨거라 하고 돌아갔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이미 반쯤 와버린 길을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일단 해열제를 먹어보고, 그래도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병원으로 오라는 간호사의 안내를 떠올렸다. 타이레놀 두 알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다행히 열이 떨어지는 기미가 보였다. 아니, 다시 열이 올랐다.
와. 진짜 망했네.
속초에 도착하기까지 주기적으로 절절 끓는 열에 오한과 근육통이 왔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드러누웠다. 뻗어 있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숙박 예약앱에서 본 대로 큰 창문을 통해 볕이 잘 들어와서, 손을 더 댈 필요가 없이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어서, 바스락거리는 이불이 하얀 새것이어서, 그래서 모텔 같지 않은데 저렴하기까지 해서. 어차피 타이레놀을 먹어서 잠잠해질 열이 아닌 건 판명이 났지만, 몇 시간 효과라도 있으니 여기에서 뭉개자 싶었다. 혹시 또 시간이 지나면 어떨지 모르니까 함께 산책하기로 한 지인에게는 내일 새벽에 갈지 말지 알려주자는 미련도 떨어보기로 했다.
약발이 떨어지고 다시 오한이 뼛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쉽다. 망했어. 불덩어리가 된 채 별안간 속초에 떨어져 있는 심정을 친구에게 전할 만한 표현이 “망했다”밖에 없었다. 친구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래도, 김도미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튿날 아침, 다시 타이레놀을 털어 넣으며 서울로 출발했다. 가는 중에도 못내 아쉬워 뒤를 돌아보는 벼락 맞은 며느리 바위처럼 고속도로를 놔두고 미시령으로 접어들었다.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손을 소독제로 닦고 편의점에서 사 온 삶은 달걀을 깠다. 잠시 후 한 부부도 정차하고 내 옆 벤치에 앉았다. 그들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가로로, 세로로 정성껏 다섯 장의 사진을 찍어주고는 내게 휴대폰을 건넸다. 민머리로 피사체가 된 것이 괜스레 의식이 되어 말을 보탰다. “항암치료 중에 잠시 여행 왔는데, 열이 나서 도로 병원에 가는 길이에요. 너무 아쉬워요.” 그들의 옆에 앉아 달걀을 마저 먹는데 아내가 맛집에서 사 왔다는 게살 샌드위치를 내게 내밀었다. 내가 순간 멈칫거리자 “아, 먹는 거 조심해야 되죠?” 하며 도로 가져갔다.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각자의 간식을 먹는 동안 아내도 암 경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항암치료의 고됨과 추적관찰의 지루한 긴장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들과 헤어지고 확인한 사진 속의 내 얼굴은 개구지고 신나 보였다. 그럼 됐다.
남은 타이레놀을 다 털어 넣으면서 고갯길을 오만 미련 떨어가며 거쳐 왔다.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형편없이 지친 미식축구 선수가 터치다운하듯 병원에 미끄러져 들어가 뻗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을 걱정시킨 게 조금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다시 확인한 호중구 수치는 이틀 사이 두 자릿수까지 뚝 떨어져 있었다. 내 게으른 예상과 달리 출발 당시의 상태는 이미 호중구 수치가 떨어지는 중이었던 것 같다. 어디에서 감염이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여태 감염이 될 때마다 균을 배양해서 확인하는 검사를 하긴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원인균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로 다 나았다. 의사는 절반 정도는 이 검사로 병원체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며 이 작은 침입자의 정체를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하긴 원인균을 아는 건 대체로 치료 계획이 필요한 의료진에게나 중요하지, 나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감염 예방은 사실상 무엇만을 특정해서 조심하는 게 불가능했다. 내 몸에는 안과 밖이 없었다. 면역 저하 상태도 그랬고, 젖꼭지에서 10센티미터쯤 위에 비죽 나와 있는 석 줄짜리 카테터도 그랬다. 피부가 절개된 채로 있는 이곳은 감염되지 않도록 특별히 잘 관리해야 했다. 여태 나의 안팎을 안전하고 평온하게 단절시키고 또 이어주었던 두꺼운 거죽, 얇고 매끄러운 점막이라든가 면역계의 복잡하고 예민한 사슬이 흐물흐물 물러진 동안은 무엇이든지 내 몸을 타고 넘나들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침입당할 확률이 늘 있었다. 하루가 멸균으로 꽉 찼지만, 그래도 아픈 날에는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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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한 대기업 부회장이 ‘멸공’ 운운하는 글을 SNS에 올려 논란을 일으켰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개인일 뿐이라고 자처하기에 그는 본인이 직접 말한 대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피해를 본다’는 기업의 경영자였고, 따라서 그 말은 모순된 변명이었다. 극우 정치인들은 그의 코미디에 적극 호응하면서 ‘#공산당이싫어요’ 따위의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을 올렸다. 그들은 멸공과 멸치와 콩을 ‘재미있는’ 정치적 밈으로 활용했다. 학살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경악했다.
조선 시대에 ‘역적’으로 몰린 이들은 가산을 빼앗겼고, 연좌제로 삼족이 멸문을 당했다. 한국전쟁기 ‘반동분자’로 지목된 사람은 인민재판에서 숙청당했다.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가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가혹한 고문과 의문사로 사라졌다. ‘부랑배를 검거하여 사회를 정화하자’는 군사정권의 구호에 4만여 명의 시민이 무작위로 끌려갔다.
멸균하려는 욕망의 바닥에는 타자가 나를 살해할 수 있다는 공포로부터의 자기보존 욕구가 있다. 그러니 무릎 꿇리고 짓밟고 찍소리도 내지 못하도록 죽여야 한다.
모든 것의 표면이 다 닳고 희미해질 때까지 한 냄비에 푹 끓여져서, 끝내 멈춘 시간 속에서 동일성을 이루며 존재하는 방식. 멸균의 이상은 마치 깡통 통조림과 같은 세계다. 세균과 곰팡이를 팔팔 끓여 없애고 아무것도 드나들지 못하게 밀봉하면 깡통 내부는 안전하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무언가를 완전히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식이 선언된 천연두조차도 원인 바이러스 검체가 미국과 러시아의 실험실에 보존되어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적이고 잠재적 침입자라서 그것들이 나를 계속 위협한다고 생각하면 일상은 공포가 된다. 죽음이 거름이 되어 새 세대를 열어젖히는 아름다운 순환, ‘끝이면서 곧 시작’이라는 시적 표현은 나에게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무서웠다. 어디에 있을지 모를 똥이, 썩은 시체가, 곰팡이가 두려웠다. 자연에는 통제되지 않은 채로 너무 많은 유기물이 떠다녔다. 나의 장벽이 완전히 사라진 어느 결에 버섯 포자가 코로 들어와서 몸집을 키우지는 않을지 상상했다. 환장할 일은 무균실에 들어가도 곰팡이가 침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 몸속에 원래 있던 것이 나를 해칠 수도 있었다.
조혈모세포 이식 후 1년을 미처 채우기 전에 재발이 되어서 나와 같은 병실을 썼던 언니는 이식을 마친 이후에도 바깥에 제대로 나가보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언니는 팬데믹의 살벌함에 바깥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친구를 만나 한번 신나게 놀아보지도 못하고 재입원 몇 달 뒤 부고가 전해졌다.
외래로 치료를 받던 중 감염이 된 어떤 환자의 감염원은 ‘새의 분변에 있는 병원체’였다. 짐작한 것과 달리 그의 투병기에는 산과 공원이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안전하게 살균된 집에서 지내는 사람에게도 새똥 속의 세균이 들어와 휘젓고 간다니. 내가 무방비하다는 것은 도무지 바꿀 수 없는 상수였다. 면역 저하 상태를 벌충할 수 있는 노력은 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저마다 똑같이 애쓰지만 다른 결과를 나타낼 때, 기저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다. 그런데 그마저도 없을 때는 운이라고 부른다. 어떤 감염은 내가 막을 수 없다. 단지 재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첫 번째 항암을 마치고 보름쯤 휴식을 취하자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등 혈액 수치들이 정상에 근접하게 회복되었다. 진료 전에 혈액검사 결과를 확인한 나는 동행한 친구에게 “치료 시작 후 첫 사과를 깎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라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그러나 진료실에 들어가 확인한 골수검사 결과는 나쁜 성적표였고, 일견 정상적으로 보이는 수치가 눈속임일 뿐이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수치상으로 정상이었던 백혈구들 속에는 악성 백혈구도 많았을 거였다.
이제 한 번 더 결과가 나쁘게 나오면 불응성, 즉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상태로 분류된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더라도, 비관해 이식은 관해 이식에 비해 비용을 보전받기도 어렵다. 실의에 잠겨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사과가 먹고 싶었다. 껍질을 두껍게 깎았다. 식이에 한해서는 내 나름의 첫 번째 일탈이었다.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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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은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가기 어렵고 여건에 맞는 교육을 받아 사회의 일원이 되기 어렵다는 이유로 시설에 보내진다.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에게 바깥세상의 문턱은 높다. 일상을 시설에 일임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자신만의 공간과 돈을 가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여성은 성적인 존재로서 성적 위협에 노출되기 쉽다는 이유로 성범죄의 빌미가 될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진다.
발달장애 여성의 양육자는 채팅앱을 만지작거리며 이름 모를 남성을 만나려 하는 딸의 안전을 염려해 불임수술을 고민한다. 임신은 막을 수 있겠지만, 딸은 아마도 친밀감과 폭력 어딘가를 계속 서성이게 될 것이다. 여성 청소년의 양육자는 가방에서 콘돔이 발견된 딸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통곡한다. 딸은 성적 관계나 그 비슷한 고민을 더 깊숙이 숨기고, 안전하지 못한 섹스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보호주의는 요보호 대상을 보호하지 않는다. 대상자를 선별하고 통제한다.
아픈 몸을 보호한다는 논리는 정말로 아픈 몸을 지켜준다고 할 수 있을까. 암환자는 암환자에 덧붙은 수많은 염려와 금기로부터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실제로 받고 있을까.
암 경험자인 친구 희진은 말했다.
“항암치료를 할 땐, ‘내가 크로마뇽인이다…. 내가 아메바다…’라고 생각해야 돼. 스스로를 호모사피엔스라고 생각하면 힘들단 말이야.”
고통받는 사람은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한다. 질병이 아니더라도, 타인에게 맞거나 모멸감이 드는 말을 들으면 똑같은 의문이 든다. 인간 뭘까. 인간이고 싶은 사람이 인간성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는 건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다. 희진은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보았던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또 보고, 담배를 피우고, 사람들의 소식에서 증발했다.
암환자가 하지 말란 것만 하고 다닌 친구는 또 있었다. 그 친구는 항암제를 매단 상태로 폴대를 질질 끌고 장례식장 앞 흡연 구역에 담배를 피우러 내려가곤 했다. 우리 집에 와서 간단히 반주를 했던 날, 친구는 꼬인 혀로 느릿느릿 말을 했다.
“나느은, 김도미가아. 아프다고 해서 하고 싶은 거를 못 하고 마악, 위축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다들 지 쪼대로 아플걸’이라고 말하는 걸 좋아한다. 암 따위 아무렇지 않다고 위풍당당하게 구는 허세조차도, 그저 제가 살던 대로 살고 싶어서 제멋대로 아팠던 무모함조차도 너무나 살고 싶은 욕망이라고 하고 싶다. 컴컴한 커튼 속에서 〈무한도전〉을 무한 반복하는 크로마뇽인이 되었든,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소독 티슈로 종일 집 안을 닦아대는 깔끔이가 되었든, 반대로 뻔질나게 나다니는 사람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죽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담배 필터를 씹어댔던 내 친구도 결국은 너무나 제 생긴 대로 살고 싶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상태와 치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자유, 근거 없고 위험한 치료법 콘텐츠에 노출되지 않을 자유, 가고 싶은 곳에 갈 자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자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자유, 에로틱한 사랑을 할 자유, 일할 자유, 쉴 자유, 치료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 그 모든 것을 선택하는 기준과 한계를 자신의 합리성에 근거하여 정할 자유에 대해서 마구 떠들고 싶다. 이 욕망은 나를 오래오래 보고 싶은 타인의 욕망과 불편하게 포개지기도 할 것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병자의 자기결정권’쯤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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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치료를 받다 죽게 되었을 때, 나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사람들이 내 영정 사진 앞에서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으며, “그래도 김도미는 잘 놀다가 갔어”라고 웃으면서 추억해 주면 좋겠다. 그게 내가 원하는 추모의 그림이다.
감염 위험 때문에 가사노동을 직접 하면 안 된다는 병원 위생 관리 교육 내용은 지킬 수 없었다. 24시간 상주하는 보호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버거웠지만 생활감이 필요했다. 현실적으로 내가 지속할 수 있는 위생 원칙을 정했다. 청소는 마스크를 끼고, 요리는 보호 장갑에 라텍스 장갑을 덧대서 끼고 하는 것으로. 호흡기, 장, 요도, 항문, 눈, 카테터, 내 몸이 열린 어디로든 감염이 되더라도 당연한 일이라고,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불가항력을 인정하자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다. 내 방식이 옳다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사는지 몰라도, 내 방식이 조금 미련하거나 무모하게 보이더라도, 그게 내가 내 기세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강건하고 잘난 사람이라서, 건강해지리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대단한 철학도 뭣도 없이, 남들이 ‘지 쪼대로 아픈’ 만큼 나도 그렇게 했다.
다시 산행길의 초입. 나처럼 막바지 단풍을 보러 온 등산객들로 들머리가 북적인다. 인파에 떠밀리듯 숲길에 들어선다. 약간의 긴장감으로 귀 뒤를 감은 마스크 끈을 매만지고, 몇 무리의 등산객들을 앞서 보낸다. 신이 난 달팽이처럼 느린 발걸음으로, 손끝을 배발처럼 너울거리면서 걷는다. 브래지어에 말아 넣지 않고 늘어뜨려 놓은 석 줄짜리 카테터 끄트머리가 늑골 아래에서 서로 부딪히는 것을 느낀다. 멧돼지가 파헤친 상수리나무 아래의 흙더미와, 주홍색으로 빛나는 버섯들과, 부지런히 부리와 머리를 움직이는 오색딱따구리의 꼬리털을 스쳐 나를 향하는 바람에 멈칫, 두렵다는 마음이 은근하게 일렁이는 것 같다. 마스크 속에서 미지근하게 데워진 공기에 희미하게 겨울 냄새가 난다. 뜨겁게 앓는 사이 단풍이 다 오그라져 버린 주전골에서, 좋아하는 노래 한 토막을 흥얼거리며 계속 걷는다.
오오 완전한 자유여 텅 빈 주머니로 걸어라
오오 완전한 자유여 오물을 뒤집어쓰고 걸어라[1]
참고 자료
1 아마도이자람밴드, 〈신이 나타나서 물었다〉 가사 부분, 《FACE》,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