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역할의 고단함 1
역정 내지 말고 들어줘
드라마 〈닥터 차정숙〉(2023)의 주인공 정숙은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고 전문의가 된다. 최종화에서 정숙은 작은 섬으로 의료봉사를 나선다.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으나, 주민들이 병원에 가려면 배를 타야 하는 의료 취약 지역이다. 그는 독백한다. “살아 있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 순간 이대로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정숙의 이 말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본 사람의 대표적인 마음가짐을 드러낸다.
고환암 경험자인 아서 프랭크(Arthur W. Frank)가 『아픈 몸을 살다』에서 보여준 것처럼, 죽음은 삶의 반대항으로 존재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1] 몸은 아프게 될 때 비로소 실체를 드러낸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이 점점 늘어나면서 병자는 비로소 몸이 자아의 물적 토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몸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협은 ‘나’라는 존재를 되짚어서 성찰하게끔 해주는 것 같다. 중대한 위기를 겪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역사가가 되고, 질병을 경험하기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의 의미를 숙고하기도 한다. 정숙은 급성간부전이 발병해 죽을 뻔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젊음과 꿈을 포기하고 헌신한 ‘정상가족’이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는다.
당연했던 가치가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을뿐더러 가짜였다는 깨달음은 기존의 세계관을 근본부터 무너뜨린다. 몸에 대한 신뢰가 깨진 순간을 기점으로, 여태 지켜온 가치관과 관계망에 대한 믿음도 연이어 터져나간다. ‘가정을 잘 가꾸는 여성’이라는 영광이라든가 내면의 가치가 큰불에 휩싸인 숲처럼 활활 타버린 폐허.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푸른 싹이 자라나 잿더미를 밀어 올리기 시작한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은, 몸을 뒤틀며 일어나는 저 고사리 같은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령 삶의 소중함 같은 것. 많은 사람이 중증질환 경험자들의 마음가짐이 정숙과 같을 거라고 믿는다. ‘삶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보다 한참 더 복잡한 의미이고,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를 기록하는 국가다. 몸 붙일 곳 하나 없이 극도로 빈곤하고 노쇠한 이에게 중증질환 판정은 차라리 ‘환자’라는 수혜자의 자리를 내어주는 사건일 수 있다. 죽든 말든 자포자기 상태가 된 환자가 치료에 협조하도록 의료진과 보호자가 음과 양으로 협동하기도 한다. 삶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고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만약 삶이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지금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계속 살고 싶다는 의미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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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균실에 입원하고 며칠 뒤, 한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크게 아픈 사람들이 선배 같은? 좀 존경스러운 게 있어.”
내가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어떤 지혜를 길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해준 말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내 인간성에 대한 고평가 혹은 존중일 수 있을까?
치료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을 받기도 했지만, 그중에서는 곧이곧대로 듣기 어려운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만큼이나 주변 사람도 경황이 없고 무섭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당황한 사람들은 아픈 사람에게 해주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말들을 쏟아냈고, 심약해진 병자는 위로의 물결을 얻어맞았다.
“정신만 차리면 다 살아.”
“요즘은 약이 좋아서 다 나아.”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중에서 ‘중병을 겪은 사람에게는 존경스러운 데가 있다’는 말은 나를 불편하게 하지도 않았지만, 기꺼이 덕담으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의 격려는 ‘고통을 지나면 성숙해진다’는 일종의 상식을 전제했다.
건강한 사람들은 긴 삶이 (잠정적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 사실을 아픈 사람을 보면서 퍼뜩 떠올린다. 그들에게 삶은 아침에 해가 뜨는 것처럼 당연하고, 떠오르는 태양을 감사하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반면 아픈 사람은 곧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닥쳐온 사람이다. 그 때문에 건강한 사람들은 병상의 커튼 뒤에서 골골대고 누워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생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중증질환자와 그의 보호자가 아등바등 사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며 지켜내는 사랑,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는 정신력이 교훈과 감동을 준다. 그것은 변호사이자 장애학 연구자인 김원영이 “장애인의 신체에 부여된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에 대한 관심”이라고[2] 짚어준 감정과 유사한 것 같다. 물론 남모르는 고통을 지나온 사람이 삶에서 길어 올린 한 토막의 문장은 분명히 철학적이거나 영적인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고통은 정신적인 깨달음과 곧잘 연결되곤 했으니까.
한편 건강한 사람들은 아픈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건강한 데다 말까지 많은 그들은 병자가 가져야 하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알려주고, 무얼 해보라거나 먹어보라는 이야기도 잘한다. 무얼 하지 말라거나 먹지 말라는 말도 한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다른 병자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염려인지 핀잔인지도 섞어가면서, 질병의 원인에 대한 여러 풍문을 중언부언 늘어놓다가 사라진다. 아무도 자신의 말에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유통기한이 지난 스팸 통조림을 경비노동자에게 선물이랍시고 내놓는 아파트 주민처럼 군다.
나도 내 삶이 소중하다. 벌써 죽기는 싫다. 기왕이면 살고 싶고, 그것도 잘 살고 싶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픈 시간 동안 배운 것들이 이후의 삶을 재미있게 만들어 주지 않을지 기대하고도 싶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아무거나 주워다 준다고 고맙지는 않다. 아프면 돈이 없고, 돈이 없으면 덩달아 시간도 없어서 예전보다 짧아진 하루가 아까워 정성껏 살아보는 일상이라도 매분 매초가 다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는 없다.
건강한 사람들의 양가적인 시선으로부터 마치 식민자와 같은 거만함을 느낀다. 아무리 생이 절실해도 아무 희망이나 아무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닌데, 건강한 사람들이 아무거나 주워다 주어서 어떤 병자는 불행하다. 적어도 나는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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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암 경험자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걸 밝히지 않는다. 나는 병에 걸리고 나서야 내 주변에 이렇게 많은 암 경험자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일하느라 만났던 사람들도 암 경험자, 같은 운동센터에 다니는 사람 몇몇도 암 경험자, 수선집 사장님도 암 경험자였다. 이전에는 그들이 ‘전에 크게 아픈 적이 있다’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크게 아팠다는 이야기에 암이냐고 되묻지 못했다. 암 경험은 ‘알리고 싶지 않을 확률이 큰’,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암 경험을 알리기가 꺼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암 경험자라는 사실이 사회생활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제로 암 경험은 연애와 결혼을 새롭게 시작하기엔 결격사유가 되고, 노동시장으로의 복귀를 어렵게 한다. 생식기에 생긴 암이나 구강암에는 성적인 연상이 뒤따르고, 간과 폐에 생긴 암은 환자의 생활 습관에서 원인을 찾게 한다. 낙인은 효과적으로 병자의 입을 다물게 하는 요소다. 주변 사람들에게 암 경험을 말한다는 것은,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힌다는 의미의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를 빌려서 ‘암밍아웃’이라고 부를 정도로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암에 드리운 낙인이 암환자임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는 충분한 이유로 보이지는 않는다. 암 경험 말하기는 미군이 2011년에 폐지한 (성소수자임을) ‘물어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는 DADT 같은 정책에 가로막혀 있지 않다. 한국에서 성소수자 군인은 커밍아웃을 지지받기는커녕 색출당하고 처벌받거나 전역 조치되지만, 적어도 암 경험자의 말하기는 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 설립에서 알 수 있듯 정책적으로 지지받는다.
본인이 암환자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알리려면 스스로가 암환자라는 정체성을 수용해야 한다. 타인이 나의 병을 알아도 괜찮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는 건 단지 암환자 개인에게 용기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질병을 받아들이는 일은 진단서에 찍힌 병명과 세트로 딸려 오지 않는다. 모든 낙인을 제거하더라도, 암이라는 병명은 죽음과 결부된 공포스러운 이미지가 있다. 미디어나 주변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재앙’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걸 인정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암환자들끼리는 ‘암’과 ‘환자’라는 두 부정적인 단어의 결합이 자아내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서인지 암환자를 ‘아만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 이름 같기도 해서 훨씬 동글해진 어감이다.
암환자임을 타인에게 알린다는 것은 사회가 아픈 사람에게 부여하는 환자 노릇을 해야 한다는 뜻, 혹은 그 노릇을 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Talcott Parsons)는 ‘환자 역할(sick role)’을 개념화하면서, 환자는 건강한 몸으로 해오던 역할들을 면제받는 대신에 빨리 낫기를 바라고 이것을 위해 기술적으로 유능한 의료의 도움을 구하고 거기에 협력해야 한다고 상정되어 있다고 설명한다.[3] 낫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환자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지만, 환자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환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병에 걸린 주제에 예전처럼 아무 음식이나 먹고, 예약된 병원 진료일을 번번이 어기며, 불규칙한 생활을 계속한다면 어느 누구도 안타깝게 여기거나 돌봐주지 않을 것이다. 이상적인 환자 역할이 아픈 사람에게 전달되는 경로는 의료 서비스, 보건복지 정책부터 옆집 사람의 관심과 개입까지 폭넓게 걸쳐 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후자 쪽이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인 걸 아니까 뭐라 하기도 좀 그래….
선의를 거절하는 건 힘들다. 주변 사람들이 염려로 덧붙인 한마디, 한마디가 낙숫물처럼 아픈 사람의 인내심에 구멍을 낸다. 결국 아픈 사람은 질병을 기점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혹은 이렇게 될 미래를 예측하고 잠적하기를 택하기도 한다. 제아무리 질병을 오명이라고 여기지 않는 병자이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환자 역할을 잘해내기 어렵다면 사라지는 게 낫다. 착한 사람들에게 면박 주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과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게 지친 마음. 아픈 사람들이 여러분 눈앞에서 사라지는 이유에는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참고 자료
1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아픈 몸을 살다』, 봄날의책, 2017.
2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2018.
3 사라 네틀턴 지음, 조효제 옮김,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 한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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